정치 권력에 흔들리는 관료 조직  회장 변평섭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2021년 8월 한국 대사관은 교민들과 한국에 협조를 해온 아프가니스탄인 등 390명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은 단 1명을 탈출시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국은 대사관 직원들이 빈틈없는 작전으로 군 수송기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 잠입시켰고 극적으로 교민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자기들 탈출에 더 신경을 썼고 탈레반이 그렇게 빨리 진격해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함으로써 그런 실수를 범한 것. 일본 언론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다루면서 일본 관료 조직이 코로나 사태 때와 똑같이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했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국의 위기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에 앞서 일본에서는 아베 전 일본 총리를 정치적 궁지로 몰아넣은 ‘모리토모 학원 스캔들’이 발생해 일본의 전통적인 관료 체제마저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2019년 아베 총리는 오사카에 있는 시유지(市有地)를 감정가의 14%라는 헐값에 우익 학교 법인에 매각한 사건으로 국회와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은 것. 아베 총리와 그의 부인이 이 사건에 관련됐다는 혐의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적으로는 아베 총리와 자민당이 상처를 입었지만, 일본이 자랑하는 관료제 역시 타격을 받았다. 헐값 매각에 관련된 관리들이 위에서 시키지도 않았지만, 윗사람 의중에 맞춰 공문서를 위조하는 등 불법을 저지른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의 관료 조직은 일본 근대화를 이끈 견인차라는 엘리트 의식이 강했고 일본 정부를 움직이는 것은 우리나라의 사무관급에 해당하는 중간 관리들이라고 인식될 정도였다. 일본 법령의 80%는 이들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자부심이 강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아베 정권, 그리고 스가 요시히데로 정권으로 이어지는 9년 동안 이와 같은 관료 조직의 전통이 무너지고 위기관리 능력 역시 추락했다.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가 이제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정치가 그렇게 발효(醱酵)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관료 조직이라고 다를 바 없다. 2018년 4월 2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월성 1호기 정지가 언제 결정되느냐?’라고 물었다. 탈원전 정책을 주장하는 문 전 대통령으로서는 큰 관심사였을 것이다. 대통령 말이 떨어지자 바로 다음 날 산업부 장관이 담당 과장을 불러 진행 상황을 물었다. 담당 과장이 “월성 1호기를 조기 폐쇄하되 다만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영구 정지 허가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2020년까지 2년간 한시적으로 가동하는 게 좋겠다”는 보고를 했다. 그러자 장관이 “너 죽을래? 즉시 중단으로 보고서 다시 써라”라고 역정을 냈다. 담당 공무원의 소신은 “너 죽을래?”에 무너질 수밖에 없고 감사원 감사가 시작되자 또 다른 공무원은 컴퓨터에서 관련 자료를 삭제했다고 한다. 이런 풍토에서 관료 조직의 전통이 가능할까? 위에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하는 게 보신에 좋아서 그렇게 했을까?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재임 때 공무원들이 대통령실 근무를 기피하는 현상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정권이 바뀌면 보신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지역화폐 발행을 반대하는 기획재정부에 대해 “나라가 기획재정부 것이냐?”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당은 기획재정부에서 예산 업무를 떼어내어 대통령 직속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렇게 되면 ‘나라 빚이 어떻고, 국가 재정이 어떻다’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수사기관도 정권이 바뀌면 마찬가지다. 위에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수사를 하고 그것을 ‘적폐 청산’, ‘비리 척결’로 포장을 할 것이다. 아니, 아직 정권이 바뀌지 않았는데도 그런 조짐이 벌써 일어나고 있다. 민주당이 입법, 행정, 사법 삼권을 다 장악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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