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시대보다 더 위기라는데…  변평섭 고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진 남천우 전 서울대 교수는 2008년 발간한 책에서 ‘이순신은 살아있다’라고 주장하여 주목받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충무공 이순신의 죽음은 1598년 노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천우 교수는 해전에서는 야간 전투를 피하는 것인데 밤중에 적을 추격하였고, 적의 유탄이 신체 어느 부위에 맞혔는지 기록이 없으며 그 결전의 순간, 주변에 있어야 할 막료들은 하나도 없었고, 조카와 몸종만 있었다는 이유 등을 열거했다. 아산 현충사에 있는 신도비도 사후 3~5년 이내에 세우는 게 관례인데 100년 후 세워졌고 죽은 지 80일이 지나 장례를 치르는 것도 살아있음에도 위장을 한 장례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순신은 ‘죽은 것으로’하고 16년간 전라남도 보성에서 은거해 살았다는 것. 그러면 왜 죽은 것으로 하고 살아야 했을까? 남 교수는 그 이유로 당시 심각했던 정쟁과 선조 임금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시기심을 들었다. 그러잖아도 장군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 백의종군을 했는데 장군에 대한 백성들의 인기가 임금의 권위를 능가하여 그 시기심으로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그리고 동인, 서인으로 치열한 정쟁 속에 희생 제물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류성룡이 영의정에서 정적의 탄핵을 받고 실각했기 때문에 그를 보호해줄 인물도 없었다. 류성룡은 동인에 속해 있었고 이순신 장군을 발탁한 처지여서 정쟁에 희생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 시대 정쟁은 치열했고 국가의 안위나 공정과 정의 같은 것 없이 오직 권력 장악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솔직히 남천우 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서울(한양)에 돌아왔을 때 로마의 전쟁 영웅들처럼 네 마리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로마 시민들의 환호 속에 개선하는 장면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이 침략해 올 것인지 탐색하라고 통신사를 보냈더니 동인과 서인, 당파에 따라 상반된 보고를 올릴 정도로 한심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고질병, 정쟁의 DNA는 우리 정치판에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그때 전쟁 속에서도 정쟁을 벌였던 것처럼,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국내외 엄중한 현실 앞에서도 정쟁은 더욱 치열해지니 말이다. <칼의 노래> 등 작품을 통해 국민적 감동을 많이 주었던 소설가 김훈 씨는 최근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하얼빈>이라는 장편 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암살했던 그 시대보다 지금이 우리에게 더 위기라고 했다. 정말 가슴을 때리는 경고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인들에게는 그런 국가적 위기에는 불감증에 걸린 것 같다. 오직 권력을 향한 ‘광기(狂氣)의 정쟁’이다. ‘짐승 같은 정권’ 등 쏟아내는 저급한 어휘들은 훈민정음을 만드신 세종대왕이 하늘에서 노하실 것만 같다. 환율이 1380대를 돌파하여 1400대를 향해 고공행진을 하든,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닥쳐오든, 오로지 정쟁이다. 입으로는 ‘민생’을 외치지만 상대 당의 가십성 실수만 노리고 발목 잡기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정기 국회가 시작되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전개되는 ‘광기의 정쟁’에 정말 국민은 피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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