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7(일) 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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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해방정국  
정병상 |    작성일 : 2019-04-15

[유병호 제독의 역사 이야기]


이승만과 해방정국

 

        유병호 예비역 해군 제독


해방정국(解放政局:1945. 8. 15-1948. 8. 15)이라함은 美 군정치하를 말 한다.

8. 15 해방은 조선인들이 예측했던 것 보다 빨리 다가 왔다. 일본 전쟁지도부 대본영(大本營)은 항복 보다는 결전주의 "1億 옥쇄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왕의 생각은 달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엄청나고 비참하게 죽어간 백성들을 생각하였다.

1945년 8월 10일 평안남도 지사 "후루가와"는 검은 안경을 쓴 한 사나이를 관사로 초청했다. 그리고 말 하였다.

 "우리 일본은 천왕의 결정으로  포츠담 회담에서 결정한 연합군 측이 제의한 사항을 받아들 이기로 하였소.

선생과 상의하고 싶은 것은 권력 공백기 동안에 발생될 수 있는 혼란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선생께서 38도 선 이북 지역에 대한 행정통치권을 접수해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일본인들의 안전 귀환과 제반 행정업무를 당분간 맡아 주었으면 하오...?"   검은 안경의 사나이는 나즈막하게 말 했다.  "고맙지만은 그런 중차대한 업무는 백성들의 신뢰를 받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 적절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검은 안경의 사나이 염동진(廉東震) 은 조만식 선생을 천거하였다.   

같은 시각 서울에서는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宋鎭禹)와 면담하고 있었다. 

똑같은 내용으로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통치권을 관리, 일본 거류민들의 무사 귀환과 제반 행정업무를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진우는 말하였다. "이런 일은 상해 임시정부 만이 할 수 있다. 머지 않아 임정(臨政)이 곧 귀환 할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류사쿠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8월 14일 엔도 류사쿠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여운형(呂運亨)에게 내일 새벽에 총감 관저에 들어 오도록 전갈(傳喝)을 띄웠다.  몽양 여운형은 정무총감의 요청을 그대로 수용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북한 땅에서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건준위(建準委)가, 남한에서는 몽양 여운형 (夢陽 呂運亨)이 이끄는 건준위가 각각 가동 되었다.  그러나 북한을 통치할 소련군은 8월8일 대일(對日) 선전포고 를하고 8월9일에 이미 함경북도 지역을 넘어 한반도 안으로 신속히 진입하고 있었다. 조만식의 건준위가 가동할 기회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오끼나와에 있는 하지 장군의 미군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사이 좌익 계열의 여운형 과 박헌영의 지하조직들이 부상하여 정계(政界)와 언론계, 문화예술계 그리고 노동,농민 단체를 전국적으로 결성하였다. 이들이 만든 대소 단체가 무려 1,194개나 되었다니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과 조직력은 매우 놀라울 뿐이다. 

다른한편 북한의 소련군은  조만식 선생을 앞세워 내막적으로 소비에트화를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조만식과 소련 군정 지도부는 속내가 달랐다. 결정적으로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을 두고 조만식은 반대를 소련 군정지도부는 찬탁으로 정면 충돌하였다. 김일성이 정면 부상하고 조만식은 뒤로 밀리었다. 나중에 조만식은 대동강변에서 총살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만식 에피소드: 조선의 기독교 신자 70%가 북한지역에 거주 하였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조만식선생을 "조선의 간디"라고 애칭으로 불렀다. 고당(古堂)조만식(曺晩植)은 강서 사람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는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혀 그 실력이 상당한 수준 이었다. 열세 살에 결혼하였고 열다섯 살부터는 사업에 종사 하였다. 젊어서는 탈선한 일도 있었지만, 일찍 기독교에 귀의 하여 한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 하였다. 그는 23세가 되어서야 평양숭실학교에 입학하였고 3년 뒤에 졸업하고 동경에 있는 유명한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영어를 공부 하여 영어 실력도 대단하였다. 

그가 명치대학에 입학한 것은 그의 나이 28세 때였고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그는 한인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였다. 31세에 뒤늦게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한 조만식은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 학교에 채용되었고 2년 뒤에는 그 학교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교장직을 사임하게 된 동기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해에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일경에게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듬해 출옥하여 조선물산장려회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남강 이승훈을 형무소로 찾아갔더니 다시 교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해 수락했으나 총독부가 그의 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같은 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그 뒤에 신간회와 YMCA 운동에도 참여하여 전국적 인물로 부각 되었다. 나이 50이 되던 해 조선일보 사장으로 초빙되어 취임하였으나 1년을 버티다 사임하였다. 그때 그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이 겨레의 지역감정 이라는 악습이었다. 조만식은 그래서 한평생 "고향을 묻지 마라"는 표어를 내걸고 지역감정 타파에 앞장섰다. 고당은 2번 상처(喪妻)하고 55세에 전선애 를 만나 결혼했고 딸 하나, 아들 둘을 얻었다. 

 일제 말기 학병에 나가라고 권하는 고당의 글이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던 매일신보에 실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글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내 평고 후배인 고명식은 두드러진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매일신보 평양 지국장이었다. 본사에서 평양 지국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학도병에 나가라는 글을 하나 조만식에게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지국장으로서는 그런 부탁을 고당에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본사에서는 지국장을 계속 못살게 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런 글을 제 손으로 한 편 써서 조만식 이름으로 본사에 보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 뒤에 해방이 되었고 지국장은 부끄러워 자살 하였다는 사실을 평양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조선일보 자료 인용)

조만식의 철학과 인생관은 정직하고 고매하였으며 만주 지역에서 마적질이나 하면서 나돌던 김일성과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소련 군정관들도 이점을 알고 처음에는 조만식을 이용하려 하였으나 기독교적 청빈 정신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그의 의지는 꺽을 수 없었다. 당연히 숙청 1호 대상이었다.

많은 사람이 월남하면서 고당에게 함께 떠나자고 왜 권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탈북을 거절하였다. "이 사람아, 나라도 이 땅을 지키다 여기서 죽어야지 떠나서야 되겠는가"라고 탈북 권유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고당은 이미 60이 넘은 노인 몸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월남할 것을 권하고 자신은 그대로 북에 남아 있다가 대동강변 모처에서 총살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간디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땅을 하직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로 떠났다.  

 한편 남한의 박헌영은 李承晩 이 귀국하기도 전인 1945년 9월 14일 李承晩을 주석으로 추대하는 인민공화국의 조각 명단을 발표하였다. 부주석 여운형,내무부장 金九,외교부장 김규식,문교부장 김성수, 체신부장 신익히 등 55명의 주요 조각 인물중 38명이 좌익계 인사였다. 여운형 과 박헌영의 조각발표는 美 군정이 자리잡기 전에 단행하므로써 인민 공화국의 구성 내각을 미군정(美軍政)이 승계토록  압박하는 효과를 높였다. 그러나 하지 장군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박헌영은 10월에 귀국한 이승만을 찾아가 주석직을 수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李承晩은 조건을 걸어 거절하였다. 11월에 上海로부터 귀국한 金九는 임정(臨政)이 정부기능을 승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지 군정과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은 김구를 데리고 하지 군정관을 만나고 상호 협조할 것을 약속하였다. 

사실 "하지" 장군은 서울에 입성하면서 조선에서 출생하고 조선어에 능통한 '윌리암스' 해군중령을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고 그로하여금 전국 투어를 통해 민심파악과 특히 백성들이 선호하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파악토록 하였다.  

단연 이승만 박사가 압도적으로 선호되었다. 하지 장군은 맥아더의 판단과 권유가 옳았다고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지 장군은 군인의 전형으로 국제정세를 깊게 이해하고 조선인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 역부족이었다.

공산주의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美 국무부의 좌우합작 정책을 강행하려는 하지의 정책은 우선 이승만의 강한 반발에 부닥치게 되었다. 김구도 이승만의 뚯을 따르기로 하였다.  

1947년 초반기까지 李承晩과 임정의 金九사이는 매사 뚯을 같이하는 동지적 관계를 잘 이어왔다. 

그러나 정당 활동 면에서는 호남의 부유층 기반을 장악하고 있는 김성수(金性洙)의 한민당 (韓民黨)이 가장 우세하였고  金九의 한독당(韓獨黨)이 가장 열세하였다. 앞으로 정치적 대세를 이끌기 위해서는 김성수의 한민당의 도움이 제일 필요하였다. 김구의 한독당은 김성수의 한민당에 수많은 러브 콜을 보냈다, 그러나 김성수는 이미 이승만에게 기울어 있었다. 김구는 김성수의 한민당을 부자 (富者) 즉 부르주아 黨이라고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독자로선의 성명서를 발표 하기에 이르렇다. 그리고 1948년 4월 김구는 李承晩이 수차 말렸으나 김일성이 주최하는 평양 대표자회의에 김규식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로써 金九와 李承晩은 정치적 결별의 수순을 밟았다. 

金九가 上海 임정에서 충칭까지 여러 곳으로 쫒겨 다니며 어려움을 겪을 때인 1933년 -1945년 까지 무려 13년 동안 신변안전과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 총통도 李承晩과 金九가 하나 되어 공산세력과 맞서주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그는 본토에서 공산당 毛澤東에 패하여 대만으로 쫓겨 와 있었다.

그래서 1947년 심복 "유어만"을 비밀리에 金九에게 보내 이승만과 정치적 화해를 하도록 권면하였다. 이웃 한국이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친구 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金九는 이를 거절하였다.

 오히려 1947년 4월 평양 행보시 로마넨코는 金九의 마음을 회유하기 위해 軍병력과 각종 전투장비 등 을 견학케하여 세(勢)를 과시 하였다고 한다. 김구도 유어만과의 대화에서 북한의 남한 침공 조짐을 감지하였고 불가항력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 막판에 金九 는 이런 생각을 하였을까?

그가 평생 몸 바쳐 온 애국애족 (愛國愛族)의 대의에 상처가 될까 마음이 무거울 뿐이다.

더구나 대만(臺灣)의 젊은 외교관 유어만은 아버지 뻘되는 金九에게 南韓은 앞으로 U.N이 승인할 한반도 유일의 자유 민주국가이거늘 어찌 소련의 위성국 北韓과 비교하는 것은 대의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실로 부끄러운 일 이었다. 역사(歷史)는 사실을 말하고 진실(眞實)을 믿는다.

[이 에피소드는 유어만이 영문으로 작성하여 이승만 에게도 전해져 오늘날 현존하는 것으로 최근에 밝혀 졌다.] 

마침내 1947년 12월 파리 U.N 총회에서 南韓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 하였다. 

그리고 1948년 초(初) U.N의 감시위원단이 서울에 입경하였고 북한에도 입북하려 했으나 저들의 거부로 입북하지 못하였다.  南韓만의 총선거는 1948년 5월 10일로 확정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남한의 지하조직 남로당을 동원하여 총선거를 방해하기로 결정하였다. 김달삼을 파견해 "제주 4. 3 폭동"을 획책하였다.  제주 폭동이 확대되자 여수의 국방군 14연대를 추가 파견키로 하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14연대에 심어 논 남로당 지창수를 비롯한 40여 명의 푸락치들에게 지령을 내려 제주로 파견되기 직전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그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의 무법천지 였다. 남한 사회 전반에 공산주의자가 없는 곳이 없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 졌다. 軍 내부에 숙군(肅軍) 바람이 몰아 쳤다.  美 군정 법령에 의거 "사상,인종,종교 등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를 보장 한다"는 법령을 악용한 미성숙한 대한민국의 민낯 이었다.  

軍의 혼란은 전력 약화를 초래 하였고 이어진 6. 25 전쟁에서 패배로 이어졌다. 

1949년 6월 26일, 6. 25 전쟁이 일어나기 꼭 일년 전 국군 소위 안두희의 총격에 의해 거목 金九는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73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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